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찰스 바클리 (문단 편집) ===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 === 어찌됐든 대학교에서 3년을 보낸 바클리는 1984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5순위로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 지명되었다. 그 후 그의 모교인 오번대학교는 바클리의 등번호 34번을 영구결번 시켰다. 대학에서의 전공은 비즈니스 경영학. 찰스 바클리의 드래프트 관련해 본인이 훗날 밝힌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바클리는 오번대 당시 몸무게가 300파운드에 달했으나 당시 그를 뽑고자 했던 필라델피아는 275파운드 정도로 감량하라고 요구했고, 이에 맞춰서 바클리는 272파운드까지 감랑했다고 한다. 그런데 드래프트 이틀 전에 그의 에이전트가 전화해 '식서스 샐러리 캡 상황 때문에 거의 최소연봉 밖에 못 줄 것이다. 1년/7만5천달러 밖에 못 받을 것 같다'고 전했다고 한다. 그러자 바클리는 "난 7만5천 달러 받자고 대학을 떠난게 아냐"라면서 "식서스가 날 못 뽑게 하면 되지"라면서 몸무게를 늘이기 위한 폭식에 도입했다고 한다. 이 덕에 필라델피아로 향해 팀과 만났을 당시 그의 몸무게는 302파운드에 달했다고 한다. 그러나 식서스는 바클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5번 지명권으로 지명한다. 바클리는 저 우려에도 불구하고 팀에 지명된 이후 4년/2백만 달러라는, 당시 기준으론 루키치고 상당히 후한 계약을 했다. 체중도 대폭 감량을 했는지 1985년 4월에 작성된 워싱턴 포스트 기사를 보면 그가 260파운드라고 나온다. [* 참고: [[https://www.essentiallysports.com/nba-news-bizarre-charles-barkley-gained-30-pounds-in-2-days-to-ensure-philadelphia-76ers-didnt-draft-him/]], [[https://www.washingtonpost.com/archive/sports/1985/04/21/bench-strength-barkleys-it-for-76ers/60fdc0fa-2ec3-430c-b2be-78eebf13a1b4/]].] 어쨌거나 그는 닥터 J라 불리던 [[줄리어스 어빙]]과 1980년대 최고의 센터, [[모제스 말론]]이 이끄는 필라델피아 세븐티식서스에서 데뷔했다. 루키치고는 운 좋게 강팀에서의 행복한 데뷔였다. 실제로 바클리는 이들을 매우 존경하고, 정말 존경하는 형님으로 모시고 있다. 모제스 말론과 줄리어스 어빙에게 성실한 자기 관리와 프로로서로 갖추어야 할 것을 배우지 못했다면 자신의 커리어에 큰 문제가 있었을것이라고 직접 말했을 정도. 실제로 1980년대 당시 필라델피아는 실력도 실력이었지만, 인격적으로 뛰어나고 프로로서 뛰어난 선수들이 많았다.(물론 어빙의 불륜 등 문제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또다른 선배선수들이었으며 막강 가드 수비수들이었던 모리스 칙스와 바비 존스는 인품이 대단히 뛰어났으며 후배들의 존경을 받는 선수들이었다. 특히 바비 존스는 역대 특급 수비수들 중 [[조 듀마스]]와 더불어 가장 매너가 좋은 수비수로 꼽히는데 많은 수비수들이 하는 더티플레이를 전혀 하지 않고 허슬플레이만으로 질식 수비를 선보여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만 1986~1989년 사이에 이들이 모두 팀을 떠나면서 분위기가 바뀌는데, 어쩌면 이렇게 좋은 동료들과 커리어를 시작했기에 이들을 모두 잃고 혼자 막장이 되어가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는 상황에 바클리가 더욱 막나가게 되었을 수도 있다. 심지어 1989년에는 "배드 보이즈" 피스톤즈에서 가장 거칠고 터프했던 릭 마혼이 합류해 바클리와 Thump N' Bump를 형성하면서 팀 분위기가 상당히 거칠어지기도 했다. 물론 바클리는 마혼과 죽이 잘 맞았지만, 점잖은 형님들과 성질 죽이면서 뛰다가 자기만큼 성질이 화끈한 마혼이 오니 고삐가 풀린 것. 실제로 바클리와 [[빌 레임비어]]와의 난투극이 바로 이때 일어났다. 그러나 바클리는 팀을 이끌던 줄리어스 어빙과 바비 존스의 은퇴, 모제스 말론의 이적 이후 급속히 쇠락해가는 팀에서 고군분투하며 팀을 이끌었다. 말론이 이적한 1986-87 시즌부터 6시즌간은 바클리의 기량상 최전성기로 이 기간동안 그는 전 시즌 올-NBA 팀(퍼스트 팀 4회, 세컨드 팀 2회)에 선정되었다. 또한 부상이 잦았던 1986-87, 1990-91 시즌을 제외하곤 매 시즌 75경기 이상을 뛰어주며 (그는 전 경기 출장이 1번에 그칠 정도로 부상이 잦은 선수였다) 꾸준히 출전했다. 당시의 필라델피아에는 닥터 J와 모제스 말론이 떠나간 뒤에도 허시 호킨스, 아몬 길리엄, 마누트 볼 등 꾸준히 괜찮은 선수들이 있었지만, 우승에는 한끝 모자란 선수 구성이었다. 구단주 해롤드 카츠는 우승 보다는 적당한 돈으로 적당한 입장수익을 벌어들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고, 그래서 당시 엄청난 강세를 보이던 동부에서 유잉의 뉴욕 닉스, 조던의 시카고 불스에 치여 플레이오프에서 수시로 탈락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우승 욕심이 없을 수가 없는 바클리는 이에 불만을 표하며 대놓고 구단 측과 싸우고, 언론에 자기 구단 까는 것은 기본에 경기 중의 난투극도 심심치 않게 벌이는 등 구단과 많은 트러블을 일으켰다. 결국 1991-92 시즌에는 플레이오프 진출조차 실패하자 불만이 폭발하고 만다. 자길 도와줄 선수가 한 명만 있더라도 나는 우승할 수 있다며 구단에게 트레이드를 요청하며 대립각을 세웠었다. 이때 어찌나 이때 한이 맺혔던지, 은퇴 후 조던과 함께 출연한 오프라 쇼에서 '나도 옛날에 피펜만 있었어봐라'라고 말했을 정도. 나중에 [[휴스턴 로키츠]]에서 만나긴 했지만 그때 우승못한 건 [[흑역사]].[* 조금 변론을 하자면 휴스턴 로키츠에서 만났을 땐 바클리 포함 다들 이미 전성기에서 조금씩 내려오던 시점이었고, 바클리 본인의 전성기 시절에서 한참 떨어진 몸 상태. 하지만 그렇다고 바클리가 스스로 체중 관리를 한 것도 아니라서 피펜이 불만을 터트린 것도 이해는 간다.][* 바클리가 떠나고 필라델피아는 후계자로 거론된 숀 브래들리, 제리 스택하우스 등이 제 역할을 못해서 한동안 침체기를 거치다가 1996년에 구단주가 컴캐스트 스펙테이커로 바뀌고, [[앨런 아이버슨]]을 드래프트하면서 다시 황금기를 맞는다.] 사실 위에 묘사된 것만 보면 바클리가 필라델피아 시절 불평만 늘어놓은 것 같지만 이와 별개로 당시 바클리는 리그 최고의 선수 중 하나였다. 1989-90 시즌에는 실제로 MVP를 간발의 차이로 놓쳤으며[* 1위표는 바클리가 가장 많이 받았는데 2,3위표를 매직 존슨이 더 많이 받아서 역전됐다.] 올-NBA 퍼스트 팀에도 필라델피아 시절에 네 번이나 올랐다.(커리어 총 다섯 번 선정. 마지막은 1992-93 시즌에 선정.) * 바클리의 경우는 해당되지 않지만 어떤 선수들의 경우 올-NBA 팀 선정횟수도 어느 정도 걸러봐야 할 필요는 있는 경우가 있다. 시대적으로 더 빡센 시대와 덜 빡센 시대가 있기 때문. 또한 팀내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위에 언급된 워디는 실력으로 따지면 도미니크 윌킨스에 버금가는 수준이었지만 디펜딩 챔피언 팀에 입단해서 실력에 비해 스탯이 낮다.[* 대신 워디는 윌킨스가 한번도 하지못한 우승을 3번이나 했다. 스탯보다 우승을 염원하는 선수들 입장으로써는워디는 축복받은 셈인것.] 역대급 슈팅 가드였던 클라이드 드렉슬러도 '''하필 조던과 매직의 전성기와 겹치는 바람에''' 그 좋은 성적으로도 퍼스트 팀을 꿈도 꾸지 못했다. 가장 압권은 4대센터로, 포지션 역대 10위 안에 들만한 센터들이 한 시대에서 뛰어 1993-94 시즌과 1994-95 시즌 당시 패트릭 유잉과 샤킬 오닐은 20-10을 훌쩍 넘기는 좋은 기량과 각자 팀을 결승까지 올려놓는 맹활약, MVP 투표 5위에 오르고도 써드팀에도 못 올랐다. 반면 센터들이 씨가 마른 시대의 디안드레 조던은 올스타도 아니었는데 퍼스트 팀. 바클리의 경우 당시 포워드진은 크게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적절한 편이다. 버드와 어빙은 바클리가 전성기에 오르기 전에 기량이 쇠퇴했고, 칼 말론이 한 자리 고정이긴 했지만 말론과 바클리의 기량은 대등했기 때문에 딱히 손해 본 건 없다. 뛰어난 기량이었음에도 바클리는 동년배 라이벌 말론과 퍼스트 팀 횟수 차이가 제법 나는 편인데 이는 바클리의 원맨팀 시절이 더 길었고, 고질적인 몸관리 문제로 전성기가 급격히 사그러들었기 때문. 일례로 둘은 동갑인데 말론은 1998-99 시즌까지 퍼스트 팀에 오른 반면 바클리는 퍼스트 팀 선정이 1992-93 시즌에 뚝 끊겼으며, 둘이 리그 최정상급 기량을 유지한 시기도 이와 비슷하다. 실제로 MVP는 피닉스 시절에 올랐지만 사실상 기량상 전성기는 필라델피아 시절이었다. 이때 눈부신 기록을 몇개만 나열하면 1. 1989-90 시즌에는 '''필드골 60%로''' 25.2점 2. 1987-88 시즌에는 58.7%로 '''28.3점''' 기록 3. 2년차부터 6시즌 연속 필드골 57% 이상/20점 이상 기록 등이 있다. 특히 집중수비를 당하는 주득점원으로 저 필드골 수치는 경이적이다. 극단적으로 골밑에서 득점하는 [[샤킬 오닐]]도 6할 성공률은 딱 두 번, 22.9점/20점이었다. 게다가 바클리는 블럭당할 확률도 높은 단신. 그러나 1992-93 시즌(52%) 이후로는 단 한 번 (1995-96 시즌, 50%)를 제외하곤 단 한번도 5할을 못 넘기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